겨우 다섯 마디의 짧은 말로 멸망의 메세지를 전하였다 (3:4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의 히브리어 원문은 다섯마디의 말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다섯 마디의 말에 십이만 명이 넘는 이방 백성들과 짐승들이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금식하며 회개하였다. 선지자 요나. 그는 북 이스라엘 왕국 여로보암 2세 (주전 786-746년) 때의 선지자로 갈릴리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약 7km 정도 떨어진 가드헤벨 출신이다 (왕하 14:25). 한때 요나는 북 이스라엘 왕국이 잃었던 영토를 회복할 것이라는 메세지를 전하였는데, 그 예언이 여로보암 2세 때 성취되어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영토를 회복하였다.
요나가 영토 회복을 선포할 때 동 시대 북 이스라엘 지역에서 활동하던 아모스와 호세아는 북 이스라엘의 배교와 사회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앗수르의 손을 통해 행해질 것을 선포하였다 (호 11:5; 암 5:27). 아모스와 호세아가 타락한 나라를 향한 심판을 전할 때 왜 요나는 번영의 메세지를 전하였는가? 라고 요나를 비난할 수는 없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메세지만을 전하는 것이 소명이기 때문이다.
사진: 욥바(야포)에 있는 요나 물고기
그 하나님께서 요나를 다시 부르셨고 니느웨 백성들을 향한 심판을 전하도록 명하셨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으니라” (1:2). 요나는 심판이라는 편지와 니느웨 행 비행기 티켓을 받았으나 지중해 건너편에 있는 다시스행 배를 타기 위해 욥바로 내려갔다. 성서 저자는 1장에서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한 이유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1:3) 라는 짧은 표현으로 알려준다. 왜 요나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 하였을까? 유대 랍비들은 요나가 도망한 이유를 왕하 14:25에서 요나가 전한 영토회복 성취에서 그 답을 찾는다. 요나의 영토회복 예언이 성취되었기에 그는 참된 선지자로 인정을 받았다 (참조. 신18:22). 만일 요나의 니느웨 예언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로 낙인찍히게 되기에 다시스로 도망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나는 자신이 전하는 예언이 성취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을까? 답은 4:2에 나온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4:2). 만일 요나가 적국 앗수르의 멸망 예언 성취를 확신했다면 그는 니느웨로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멸망의 메세지 안에 담긴 하나님의 긍휼을 보았다. 그는 니느웨 백성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과 심판 계획을 취소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요나의 하나님은 은혜. 자비. 노하기를 더디하는. 인애가 크신. 재앙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4:2).
요나는 다시스 항구에 도착하지 못했다. 대신 인류 최초의 살아있는 잠수함 (큰 물고기 뱃속)을 타고 사흘 후에 지중해 동편 어딘가에 내렸고 하나님의 두번째 부르심에 응답하여 니느웨로 갔다 (3:1-2). 큰 성읍 니느웨. 요나서에 5번 등장하는 “큰 성읍.” 다른 성서에는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 앞에 큰 성읍.” 그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들려주는 “큰 성읍”의 의미를 들어보자.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4:11). 십이만여 명이 거하는 성은 실제로 거대한 성읍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신 것은 성의 크기가 아닌 소망없는 영혼들이었다. 악독으로 가득찼지만 그들도 구원받아야할 백성들이었다.
사진: 욥바의 야경
큰 성읍 니느웨. 사흘 길을 걸으면서 심판을 전해야 했던 도시에서 요나는 하룻길을 걸으면서 짧은 다섯 마디의 말만을 외쳤다 (니느웨가 회개치 않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그 다섯 마디의 말에 니느웨가 회개한 것이다.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3:9). 요나는 다이어리에 형광팬으로 40일 뒤의 니느웨의 멸망 예정일을 표시해 놓고 그 날을 기다렸으나 아무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요나 입장에서 볼때 여로보암 2세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영토 회복의 메세지를 일관성있게 성취시키신 하나님은 악독으로 가득찬 니느웨를 향한 심판의 메세지 역시 일관성있게 성취시키셔야 했다. 그러나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고 요나는 거짓 선지자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4:3). 불명예스런 거짓 선지자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것이 낳았다. 혹이라도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시킬수도 있기에 요나는 성읍 동편 언덕에서 그 멸망의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성읍 동편 언덕의 박넝쿨. 요나는 자신이 심지 않은 박넝쿨 그늘 밑에서 기분 좋은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 아침 그가 본것은 화염에 휩싸인 니느웨가 아닌 말라 죽어버린 박넝쿨이었다. 박넝쿨 그늘이 사라지자 요나는 뜨거운 둥풍으로 인해 견딜 수 없었고 죽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 그는 니느웨 영혼들보다 자신에게 그늘을 만들어 준 박넝쿨을 더 소중했다. 그는 박넝쿨을 아꼈고 하나님은 그 박넝쿨과 비교할 수 없는 십이만여 명이 넘는 백성들과 짐승들을 아꼈다.
사진: 욥바의 명물 시계탑
유대 전통에 따르면 요나는 엘리야가 살린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다 (왕상 17:23). 유대 랍비들은 그의 아버지 아밋대 (뜻: 진리)의 이름과 의로운 심판자의 이미지가 강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요나의 성격을 추정한다. 그는 용서 없는 엄격한 진리만을 외치는 인물로 악독한 니느웨를 향한 용서 없는 진리의 심판만을 고집한 인물이다. 아이러니일까? 유대 절기인 욤키푸르(대속죄일)때 유대인들은 엄격한 진리의 심판만을 요구한 요나서를 읽는다. 그 이야기 속에서 유대인들은 니느웨 백성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큰 긍휼을 구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들려주는 요나 이야기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만에 살아난 선지자 이야기가 아닌 악독이 가득찬 이 세대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긍휼로 가득찬 이야기이다
* 위 글은 새가정사 5월호에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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