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 당시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Lawrence of Arabia). 주인공 로렌스가 베두인 부대를 이끌고 아카바만에 주둔하고 있던 오토만 터어키 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와디 시르한 (Wadi Sirhan)을 지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속에서 베두인 족장은 다음과 같이 로렌스에게 경고를 한다. "이 사막은 신이 허락한 사람만이 건너갈 수 있다!" 그만큼 시르한을 건넌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아니 무모하다 할 정도로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훗날 로렌스 (T.E. Lawrence)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우리가 시르한에 들어섰을때 우리를 환영하는 것은 다름 아닌 뱀들이었다. 계곡 곳곳에는 독사들과 코브라들, 그리고 흑사 (black snakes)들이 득실거렸다. 밤에 이동하는 것은 더더욱 위험하였고 한 걸음 내딜때마다 막대기로 주변의 덤불을 내리치면서 걸어야만 했다."
영화속에서나 상상해 볼만한 장면으로 지나칠 수 있지만, 사실 로렌스가 지났던 와디 시르한은 과거 에돔 땅을 우회하여 북진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쳐 지나갔던 와디이다 (민 21장). 본문, 4절에서는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였다 (ותקצר נפש העם)고 기술한다. "תקצר נפש"에 대해 삿 10:16, 슥 11:8에서는" 참지 못하는"으로 해석하였다. 아마 백성들은 네게브 광야의 아라드를 정복한 후 계속 북진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했더라면 그들은 오래지 않아 가나안의 중심지역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현재 아라드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대략 90 km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차로 1시간 30분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이다) 그런데, 거꾸로 돌아서 홍해로 내려와서 에돔 지역 동편으로 이동하였으니, 게다가 길이 험하였으니 그들의 참을성이 바닥난 것이다. 물론 지난 38년 동안 수차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에는 모세뿐 아니라 여호와를 향해서도 원망한 것이다. 결국 그들의 원망은 하나님의 징계로 이어졌고 불뱀들이 많은 백성들을 죽이게 된다.
영화속에서나 상상해 볼만한 장면으로 지나칠 수 있지만, 사실 로렌스가 지났던 와디 시르한은 과거 에돔 땅을 우회하여 북진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쳐 지나갔던 와디이다 (민 21장). 본문, 4절에서는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였다 (ותקצר נפש העם)고 기술한다. "תקצר נפש"에 대해 삿 10:16, 슥 11:8에서는" 참지 못하는"으로 해석하였다. 아마 백성들은 네게브 광야의 아라드를 정복한 후 계속 북진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했더라면 그들은 오래지 않아 가나안의 중심지역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현재 아라드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대략 90 km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차로 1시간 30분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이다) 그런데, 거꾸로 돌아서 홍해로 내려와서 에돔 지역 동편으로 이동하였으니, 게다가 길이 험하였으니 그들의 참을성이 바닥난 것이다. 물론 지난 38년 동안 수차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에는 모세뿐 아니라 여호와를 향해서도 원망한 것이다. 결국 그들의 원망은 하나님의 징계로 이어졌고 불뱀들이 많은 백성들을 죽이게 된다.
불뱀과 놋뱀 사건, 과연 유대교와 기독교는 어떤 관점에서 이 본문을 해석할까? 1, 2차 성전 시대 당시의 문학 작품들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2차 성전 시대의 문학 작품들의 치유 해석과 동 시대의 예수의 치유 사역 사이의 공통 분모가 있다면 무엇일까?
유대교와 기독교의 불뱀 사건 해석은 서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먼저 유대교의 해석을 보면, 1차 성전 시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뱀은 주술적 의미를 담고 있는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드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가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왕하 18:4)." 히스기야가 왕으로 재위하던 시기에 모세의 놋뱀은 숭배의 대상이었다. 비근한 예로 삼상 6장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법궤를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려보낼때 금독종 다섯, 금쥐 다섯마리를 만들어 보낸다. 이는 다분히 주술적인 방법을 통해 그들에게 있었던 재앙이 여호와로부터 온 것인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재앙의 근원이 된 뱀이나, 독종 모양을 형상으로 만들어 치유를 바라고 숭배를 한 것이다.
사진: 텔 아라드 전경입니다
사진: 텔 아라드 전경입니다
2차 성전시대에는 민 21장의 놋뱀 사건을 주술적 혹은 숭배의 대상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신앙 (belief)으로 해석한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회개할 때 그 즉시 치유를 베풀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놋뱀을 만들라고 하셨을까? 솔로몬의 지혜서(The Wisdon of Solomon)는, 놋뱀을 하나님께서 배푸신 구원의 상징적 기능,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의 명령을 상기하도록 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다.(16:6, 11) 미쉬나 Rosh Hashahan 3:8에서는, 출 17:11의 아말렉과의 전쟁 당시의 승패는 모세의 손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 혹은 패배가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이 여호와를 향하고 믿음으로 전쟁을 할때 승리가 주어지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탈굼 요나탄에서는 "만일 뱀에 물린 사람이 그 마음을 하나님께 향한다면 그는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라고 기술한다.
고로 모세의 손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도구였을뿐, 그 올라간 손이 승리를 준것은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모세가 만든 놋뱀 역시 그 놋뱀 자체가 백성들에게 치료의 효과를 주는 주술적 힘을 지닌 것은 아니다. 백성들이 회개한 것이 (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 7절) 이유가 되어 여호와께서 그들을 치료한 것이다. 미쉬나의 주석서인 그마라 (Gemara) b. Ber. 33 a.에 보면, 1세기경 당시 기적을 행하던 인물, 랍비 하니나 벤 도사 (R. hanina be Dosa) 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See my sons, it is not a serpent that kills, but rather it is sin that kills (아들들아 보거라. 뱀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죄가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이란다!"
결론적으로, 2차 성전 시대 당시의 유대 문학작품들은, 놋뱀 자체가 그 어떤 치료의 효과가 있다고 보지 않고, 그 놋뱀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도구였음을 강조한다.또한 사람들의 회개와 믿음을 강조한다.
사진: 베드로 수위권 교회 (베드로 재사명 교회)입니다.
이에 반해, 기독교에서는 민 21장의 놋뱀 사건과 출 17장의 아말렉과의 전쟁때 모세의 손을 기독론 (Christology)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초대 교부들은, 뱀은 첫 아담이 죄를 범하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죽음을 가져왔고 나무에 달린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생명을 가져왔다고 해석하였다. 또한 모세의 손이 들린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손이 높이 들려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신, 혹은 승리를 주신 것으로 해석하였다.
사진: 베드로 수위권 교회 (베드로 재사명 교회)입니다.
이에 반해, 기독교에서는 민 21장의 놋뱀 사건과 출 17장의 아말렉과의 전쟁때 모세의 손을 기독론 (Christology)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초대 교부들은, 뱀은 첫 아담이 죄를 범하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죽음을 가져왔고 나무에 달린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생명을 가져왔다고 해석하였다. 또한 모세의 손이 들린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손이 높이 들려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신, 혹은 승리를 주신 것으로 해석하였다.
중세 시대에는, 십자가를 놓고 양쪽간에 논쟁이 붙기도 하였다. 유대교에서는 기독교의 십자가를,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통해 어떤 것도 형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기독교계에서는 놋뱀 (기독론으로 볼때 십자가) 은 하나님께서 만들라고 하셨으니 그것은 십계명에서 말한 것과는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David Flusser 는 2차 성전 시대 당시의 죄와, 질병 그리고 치료의 상관 관계를 통해 예수의 치유 사역을 해석한다. 그에 의하면, 당시 유대 문화는 질병의 원인을 죄로 보았고 (참고 요 5장, 9장), 질병으로부터 고침받는 것은 회개와 믿음이 선행되었을 때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2차 성전 시대의 문학 작품들도 동일한 범주안에서 질병과 치유를 이해할 수 있다.
사진: 십자가의 길 9처소에서 본 예수님 무덤 교회의 십자가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치유 사역을 보면, 눅 5;19-20에서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는 예수의 말씀은 이미 그 중풍병자가 예수께 나오면서, 예수께서 그의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회개가 선행된 것을 보신 것이다. 그러하기에 예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다!" 라는 선포후에 그의 질병을 치유한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의 치유 사역은 단순히 치유 자체의 목적보다는 그 치유를 통해 가르침을 베푸는데 목적이 있다. 중풍병자의 치유를 통해 예수께서는 그가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당시 모였던 백성들에게 가르친다. 또한,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는느냐?" 라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불편한 마음에,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가르쳐 준다. 따라서, 예수의 질병 치유는 그분만이 갖고 있는 신적 권세를 드러내는 목적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참고.
Jacob Milgrom, Numbers ch. 21 in JPS Torah Commentary
David Flusser, It is not a serpent that kills in Judaism And the origin of Christianity, The Magness Press, Jerusalem, 1988, pp 543-551.
נחש הנחושת במהלך הדורות אי שנאן (עורך) י זקוביץ ודי פרוינד נהרדעה - דפי פרשת השבוע של האוניברסיטה העברית (בירושלים ,חוקת )תשסייא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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