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3:15는 해석상에 논란이 있는 구절이다. 많은 학자들이 이 구절의 정확한 의미를 해석하려고 시도하였다. 히브리어 본문은 다음과 같다:
הן יקטלני לא איחל אך דרכי אל פניו אוכיח
이 구절을 기록된 히브리어 자음(크티브) 그대로인 לא איחל (not) 로 읽을 경우 "나에게는 소망이 없다" 혹은 "나는 기다릴 수 없다" 라는 뜻이 된다. 한편, 히브리어 발성 읽기(크레)에 따라 לו איחל (to him) 로 읽는다면 "나는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혹은 "나는 그를 기다리리라" 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לא 로 읽느냐 혹은 לו 로 읽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사진: 엘라 골짜기 (삼상 17장의 배경)
1) לו (to him)로 읽을 경우:
- 보라! 그가 나를 죽이시리라! 나는 그를 기다리리라// 나는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그러나 이렇게 해석할 경우, 하나님이 욥을 죽이신다면 도대체 욥은 무엇을 기대하거나 무슨 소망을 갖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하기가 어렵다. 설령, 욥이 죽음 이후의 세계를 기다리는//소망하는 듯한 말을 하였다 하더라도 구약성서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개념이 발달되지 않았기에 욥이 사후 세계에 소망을 두었다고 추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 혹 הן יקטלני 를 "보라 비록 (even if) 그가 나를 죽일지라도" 로 해석한다면 뒤이어 "나는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혹은 "기다리라" 라는 비교적 매끄러운 해석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반절에 이어지는 אך (but, however)와는 연결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אך는 주로 전반부에 나오는 것에 반대되는 말을 할때 쓰이기 때문이다. "보라 비록 그가 나를 죽일지라도 나는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그러나 나의 길을 그 앞에 두고 나는 변박하리라!" 게다가 16절과 18절에 의하면 욥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기 보다는 자신의 의로움에 소망을 두고 있다.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정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
2) לא (not) 로 읽을 경우:
- 이 경우 욥에게는 그 어떤 소망이나 기다림이 없다: "보라 그가 나를 죽이시리라 나에게는 소망이 없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나의 변론을 하리라..." 라는 의미로 해석을 할 수가 있다. 만일 욥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일 것이라는 것을 믿거나, 확신한 상태에서 "보라 그가 나를 죽이시리라" 라는 말을 하였다면 욥에게는 정말로 소망이나, 그 무엇을 위한 기다림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의로움을 변론하는 것 역시 뛰어넘을 수 없는 죽음이라는 장벽 앞에서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 혹 יקטלני (He may slay me - 혹 그가 나를 죽일수도 있을 것이다!) 라는 가능성이나 추측이라도 욥은 여전히 그 어떤 소망이나 기다림에 대한 기대를 할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미래 행사를 내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반절에서 욥은 하나님과의 변론을 쉬지 않겠다고 말한다.
어느 것이 더 정확한 해석인지 혹은 본문의 의도에 좀더 가까운 것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13장 전체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13장은 11장 소발의 첫번째 말에 대한 욥의 대답이 시작되는 12장에 연결된다. 12장에서 욥은 소발과 그의 친구들에게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한다 (12:4):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의롭고 온전한 자가..."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인간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13장 초반부에서도 욥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들을 깨달았다고 주장한다.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깨달았느니라"(13:1). 그리고 그는 여전히 하나님과 변론을 할 수 있는 의로움이 있는 반면 친구들은 불의하다고 주장한다 (13:3, 4). 19절까지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의 의로움을 변론하는 말을 한 후 20~28절에서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욥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자신있게 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13:22).
따라서, 12장~13:19절까지 욥은 1) 자신의 의로움. 2) 하나님의 주권. 3) 자신을 위한 변론을 준비하고, 13:20절 이하에서는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와 그 분과의 대면을 기대한다. 욥은 자신이 의롭기 때문에,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의 이유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하기에 욥은 그 고통의 원인을 인간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는 하나님께 묻고 싶고 그 이유를 물을 정당성이 있다고 믿고 있다. 욥은 그 분과의 변론을 통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고 싶다.
이제 13장 13절부터 해석을 해 보자.
החרישו ממני ואדברה אני ויעבר עלי מה
-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닥치든지 내가 당하리라
한글 성서는 부드럽게 번역을 하였지만, 실제 히브리어 החרישו ממני 는 매우 강한 어조로 "조용히 해!" 라는 뜻이다. 영어로 하면 "Keep quiet!" 가 된다. 다음으로 ואדברה אני - "나로 말하게 하라!" 좀더 직역을 해 보면 "내가, 내가 말좀하자!" 라는 뜻이다. 1인칭을 두번이나 동사와 대명사를 반복 사용함으로서 욥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의지를 강조한다. ויעבר על מה -"그리고 무엇이든지 나에게 닥치게 하라" (무엇이 내게 임하든지 내가 당할 것이다).
על מה אשא בשרי בשני ונפשי אשים בכפי
- 무슨 이유로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영혼을 내 손에 놓겠느냐? (14절)
- 무슨 이유로 내가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위험에 처하게 하겠느냐?
JPS (유대인 버전)는 이렇게 번역을 한다.
- How long! I will take my flesh in my teeth; I will take my life in my hands.
- 언제까지! 나는 내 살을 내 잇속에 넣으리라! 내가 내 생명을 내 손에 놓으리라!
히브리어 על מה 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뒤 따라오는 욥의 말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준다. 욥이 문자적으로 자신의 살을 이로 물고 있다거나, 그 생명을 스스로 위험에 내던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슨 이유로 인해서 스스로 위험속에 빠지겠느냐," 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욥은 생명의 위협이 되는 그 어떤 죄를 범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נפש + בכף 이 표현은 구약 성서에 6번 등장하는데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어떤 상황에 부딪히거나 (삿 12:3; 삼상 19:5; 삼상 28:21) 혹은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경우(렘 12:7; 시 119:109)에 사용되었다. 전자의 경우 주로 전쟁과 관련된 것으로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혹은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 스스로 위험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후자는 수동적으로 생명의 위협속에 빠지는 것이다. 이에 비춰볼때 욥기 13:14는 후자의 경우로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경우이다. 욥이 당하고 있는 생명의 위기는 외부로부터 온 것이지, 그 자신의 범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욥의 현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속에 놓여 있다. 그가 친구들에게 선포한대로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 (12:10). 따라서 죽고 사는 권세가 하나님의 손에 있으며 현실적으로 그는 이미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다 (13:14). 설령 그가 죽는다 할지라도 그에게는 의로운 자신에게 임한 고통의 원인을 알고 싶다. 오직 그 답은 주권자에게 있기에 욥은 변론을 준비한다. 그러면서도 욥은 자신의 생명이 연장되기를 구한다.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13:21).
19절에서도 욥은 자신과 변론할 자가 있다면, 즉 자신이 의롭지 않다는 것을 변론을 통해 깨닫게 된다면 그는 잠잠할 것이고 죽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אגוע (I will die)는 구약성서에 10번 등장하며 모두 죽음과 관련있는 상황속에서 사용되었다. 이를 통해 욥은 확신한다. 그 스스로에게는 고통의 이유나 죽을 이유를 찾지 못함을, 동시에 답은 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적어도 욥은 확신한다. 자신은 죽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자신의 의로움을 하나님 앞에서 변론할 만큼 그는 정당한 정직과 의로움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경건하지 않은 자라면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 (13:16). 그러나 자신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며 그때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13:16). 그렇다면 13:15절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좋을까?
14절과 15절을 수사학적 역설 (Rhetorical paradox)로 본다면,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의롭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의 의로움을 변론할 자신이 있다. 따라서 욥은 소망이나 기대를 잃지 않고 있다. 그에게는 여전히 소망과 기다림이 있다. 그러하기에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고 싶다. 만일 이 수사학적 역설이 맞는다면 논란이 되는 לו와 לא 중 첫번째가 본문의 상황에 더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전체적인 해석은 매끄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컨택스트속에서는 לו איחל (나는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나는 그를 기대하리라)로 해석하는 것이 욥의 의도를 좀더 정확하게 파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보라 그가 나를 죽이시리라 (실제로,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이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자신은 죽을만한 죄를 범하거나, 고통을 겪어야할만한 죄를 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나는 그를 기다리리라 (20절 이하에 의하면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얼굴을 숨기신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분이 자신을 부르고 말씀하시기를 기다린다)
-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나의 길(행위)를 변박하리라 (욥은 자신의 정당성을 변론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욥은 고통의 원인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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