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신약성서의 이야기들중에서 가장 많이 욕을 먹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그리고 율법사들일 것이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는 쉴세없이 그들의 외식을 꾸짖기도 하신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공공연하게 대중의 욕을 먹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세리들이다. 세리 = 죄인 이라는 등식이 늘 그들에게는 표딱지처럼 붙어 있었다. 여기서 죄인이라 고리대금을 하는 이들과 창녀들을 말한다. 세리들은 사회악의 축일뿐 아니라, 회당에서 출소를 당하고 국가적으로는 역적으로 낙인이 찍인 이들이었다.
왜 그런가? 고대 시대의 전쟁은 경제적인 착취가 최우선 목적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지배하였던 외세는 이스라엘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징수하였고 로마 시대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세금을 거두기 위해 세무 공무원을 파견하지 않고 현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세무 공무원을 세워서 세금을 거두었기 때문에 자국민을 대상으로 일을 하는 세리들은 자연스럽게 공공의 적이 되었다. 그럼 로마 시대 당시, 좀 더 정확하게 예수 시대 당시 세리들은 임금이 전혀 없었는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생계를 위해서 정해진 세 이상으로 세금을 거둬들여야 했는가? 눅 3장 12-13절은 이에 대한 답을 준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만일 세례 요한의 말, "부과된 세"를 로마 정부에서 거둬가는 세금으로만 이해한다면, 그리고 그 이상을 부과하지 말라는 말로 받아들인다면 당대의 세리들은 로마 정부를 위해 무료 봉사를 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 말하는 "부과된 세" 에는 틀림없이 세리들의 임금이 포함된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문제는 세리들이 자신들이 받아야 할 부과된 세 이상의 것을 강탈하는 것이었다.
로마 정부를 대신해서 일하는 것도 미운데 부과된 세 이상의 것을 강탈하고 착복하는 세리들이었으니 공공의 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어떤 세리들은, 자신은 그림자처럼 숨어 있고 다른 사람들을 세리로 고용하여 세금을 거둬들이기도 하였는데, 이는 또 다른 문제를 양산하였다. 왜냐하면 자신의 수입이 줄어드니 당연히 부과된 것 이상의 세금을 더 많이 거둬야만 수입에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공공의 적 세리, 그 중에 삭개오가 있었다. 삭개오는 그 뜻이 "순결, 정결"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의 삶은 그의 이름에 걸맞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 19장에서 삭개오를 자세하게 소개한다. "세리장, 부자, 그리고 키가 작은 사람." 주전 6세기 경에 발견된 이스라엘 사람의 뼈를 조사해 보니 이스라엘 사람의 키는 대략 150-160cm 사이 였다. 가끔 성서는 키가 큰 사람들을 소개한다. 예를 들어 사울은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 컸더라" (삼상 10:23) 라고 소개한다. 즉 머리 하나 사이즈가 더 컸다는 이야기이니 사울의 키는 대략 180cm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삭개오는 키가 작았으니 아마 그는 140cm 정도 혹은 그 보다 작았을 수도 있다. 군중들 틈에 끼여서 예수를 보고 싶었지만 자신의 신체적 장애, 그리고 그 보다 더 무서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였기에 삭개오는 예수를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마 삭개오는 한번 마음에 먹은 것은 꼭 이루고 마는 성격을 지녔던 것 같다. 예수를 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가기로 작정을 했으니 말이다.
사진: 여리고의 돌무화과 나무
그럼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는 어떤 나무이며 왜 하필 삭개오는 그 나무에 올라갔을까? 정답부터 말하면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는 "돌무화과 나무"이다.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시크모레" 라고 해서 뽕나무가 아닌 돌무화과 나무에 삭개오가 올라간 것이다. 그럼 왜 하필 돌무화과 나무인가? 일단 정황상 두가지 답이 가능하다. 당시 돌무화과 나무는 길가에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라는 말씀에 비춰보면 예수께서 길을 따라 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삭개오는 분명 자신이 쉽게 올라갈 수 있는 나무에 올라갔다. 주변에 얼마나 많은 나무가 있었는가? 는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나무가 많아도 올라갈 수 없는 나무라면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따라서 삭개오는 예수를 보기 위해 길가에 있는 자신이 올라갈 수 있는 만만한 나무에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는 아니다. 또 다시 우리는 질문을 해야 한다. 왜 삭개오는 하필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갔는가? 꼭 돌무화과 나무만이 그가 올라 갈 수 있는 유일한 나무였다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진: 뽕나무 (인터넷 구글 이미지에서 다운로드 받은 것임)
구약성서에 보면 뽕나무, 돌무화과 나무 그리고 무화과 나무가 각각 다른 단어로 쓰인다. 뽕나무는 "베카", 돌무화과 나무는 "시크마, 그리고 무화과는 "테헤나" 로 불린다. 구글에서 각각의 나무를 찾아보면 그 나무들이 전혀 서로 다른 것을 알수가 있다. 그중에서도 삭게오가 올라간 나무인 돌무화과 나무가 등장하는 성서의 글들 중에 아모스 7:14를 주목해서 볼 필요성이 있다. 아모스가 자신을 소개할때,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라고 말한다. 한글 성서에는 뽕나무로 나와 있으나 히브리어로 보면 시크마 즉 돌무화과 나무가 맞다. 그리고 재배한다는 말은 돌무화과 나무의 열매에 상처를 주는 일을 뜻한다. 그럼 왜 열매에 상처를 줘야만 하는가? 고대 시대의 돌무화과 열매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먹었다. 그런데 열매의 껍질이 두꺼워서 그냥 재배를 하면 맛이 없고 열매에 상처를 주면 껍질이 얇아져서 맛이 좋아졌다고 한다. 주로 목자들이 낮에는 목양을 하고 저녁때쯤에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서 상처를 주는 투잡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다.
사진: 뽕나무 열매 (인터넷 구글 이미지에서 다운로드 받은 것임)
목자라는 직업 특성상 여기 저기를 옮겨 다녀야 했고 풀을 찾아야 했는데,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양떼들에게 풀을 먹이려면 그 마을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제공을 해야했을 것이다. 양을 주던지 아니면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을 것이다. 어쩌면 여리고 근처에서 목양을 하는 목자들도 여리고에 들어와서 목양을 하면서 헤질녘이 되면 마을의 돌무화과 나무 과수원에 올라가서 열매에 상처를 주곤 하였을 것이다.
목자들이 주로 올라가는 나무, 그 돌무화과 나무에 삭개오가 올라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 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찾아 오셨다. 여기서 삭개오가 왜 하필 다른 나무가 아닌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갔는지에 대한 추리를 해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삭게오를 만난 시간대는 대략 저녁 무렵이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하룻밤을 머물고 가야겠다" 라고 하셨으니 말이다. 군중들 틈속에 있는 예수, 그리고 그 예수를 앞뒤로 둘러싸고 길을 걸어가는 군중들, 예수를 나무위에서 바라보던 삭개오! 자신의 목적인 바라봄의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 순간 돌연 예수는 삭개오를 올려다 보신 것이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던 그 나무를 바라본 것이다.
사진: 돌무화과 나무 열매 (인터넷 구글 이미지에서 다운로드 받은 것임)
어쩌면, 삭개오는 혹 사람들이 자신이 올라간 돌 무화과 나무를 본다 할지라도 목자 혹은 누군가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서 열매에 상처주는 일을 하겠거니 라는 생각을 하며 무시하고 지나치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은 바라보기만을 원했으니....
그러나, 예수는 그 이상을 원하셨다. 죄인으로 낙인찍힌 삭개오를 만나기 원하셨다. 그래서 그를 그 만남의 자리로 초청하였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인자와 죄인과의 만남에 불쾌감을 드러낸 것이다.
사진: 예수와 삭개오 (인터넷 구글 이미지에서 다운로드 받은 것임)
만일 예수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면 아마 교회는 발칵 뒤집힐 것이다. 예수를 맞이하기 위해 온갖 준비를 다할 것이다. 아마 교회마다 사람들로 가득찰 것이고, 어떤 이들은 예수와의 만남을 위해 회개하고, 어떤 이들은 특별 공연을 준비할 것이다. 맛있는 식사도 겸혀서 말이다. 그러나, 오신 예수가 교회가 아닌 길거리 사람들을 찾아간다면, 노숙자를 찾아간다면, 불량배나 창녀들 그리고 사회적으로 악의 축이라고 불리는 이들을 찾아가서 함께 식사를 하고 즐긴다면 교회는 몹시 당황할 것이다. 성서 세계속의 예수가 죄인을 만나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가 되고 은혜가 되지만, 만약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에, 마을에 예수께서 찾아오셔서 교회가 아닌 소위 죄인이라 불릴 만한 사람들을 찾아 다니면서 만난다면 혹 우리 역시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라고 하지는 않을까?
흥미롭게도, 성서속의 예수는 세리들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 자리에서 그들에게 근엄한 표정으로 회개하시요! 라고 외치지 않았다. 오히려 성서와 성전을 늘 가까이 하는 이들, 거룩함을 지향하던 이들을 향해서 거침없이 회개할 것을 외쳤다. 삭게오가 넘지 못했던 장벽은 키의 장벽이나, 그의 불명예스러운 직업의 장벽이 아닌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예수인들 (Men of Jesus)의 장벽이었다. 그 장벽을 뚫을 수 없었던 삭게오는 예수를 그저 바라봄의 대상으로만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장벽을 뚫었다. 그리고 삭게오를 찾아오셨고 그를 만났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죄인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아니 세상의 죄인들을 향해 나갈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어야 한다. 교회의 문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 스스로의 장벽에 갇히는 꼴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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