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그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7km 정도 떨어진 시골 마을 아나돗 출신으로 다윗 당시 대제사장직을 지냈던 아비아달의 후손이다. (왕상 2:26). 선지 소명을 받던 그 날 그는 고백한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1:6)” 나는 아이라 (나아르 아노키. 히브리어) 라는 말은 어린 아이 혹은 청년을 의미하는데 예레미야는 십대 후반 혹은 20세때에 선지 소명을 받았다 (요시야 왕 제 13년, 주전 627년). 하나님은 청년 예레미야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소명을 그에게 주신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1:10). 특별히 예레미야가 전해야 했던 메세지는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멸망이었다.
솔로몬에 의해 7년동안 건축된 예루살렘 성전은 남 유다의 심장이었다. 성전 봉헌식 때 솔로몬은 이렇게 외쳤다.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 (왕상 8:13). 제사장들이 성소로 언약궤를 옮기고 나올 때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구름이 성소를 뒤덮었다. 그 영광의 성전 봉헌식 이후 400년 가까이 지나는 사이 이스라엘 나라는 온갖 상처 투성이의 역사로 얽룩졌다. 하나님을 향한 배교. 양분된 나라. 북 이스라엘의 멸망. 지속적인 외적의 침입. 이집트와 바벨론의 패권 다툼속에서 정치적 줄타기를 하며 어느쪽 멍에가 더 가벼운지 눈치를 봐야만 했던 남 유다는 과거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잃어버린지 오래였다.
예루살렘. 예레미야가 멸망을 예언한 예루살렘은 단 한번도 외적의 손에 의해 완전히 파괴던 적이 없었다. 히스기야 당시 앗수르의 산헤립도 예루살렘 정복에는 실패하였다.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영원한 처소이기에 그 어떤 강대국의 칼과 창도 감히 넘볼수 없으리라고 유다 백성들은 굳게 믿었다.
사진: 나사렛 전경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여러 차례의 큰 지진에도 불구하고 성전은 한번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남 유다의 죄악은 하나님의 심판의 시계를 빠르게 돌아가도록 하였다. 그 심판을 멈출수 있는 의로운 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레미야의 선지 사역 당시 왕이었던 요시야는 종교 개혁을 통해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집트의 바로 느고와의 므깃도 전쟁에서 전사하였다 (왕하 23:29). 그후 등극한 4명의 왕들은 (여호아하스, 여호아김, 여호아긴, 시드기야) 한결같이 므낫세의 죄를 따라 배교의 길을 걸었다. 그 사이 북쪽의 신흥제국 바벨론은 앗수르를 역사의 뒤안길로 보낸뒤 (주전 612-605년사이) 남쪽의 이집트와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하였다 (갈그미스 전투. 주전 605년). 이후 친이집트 정책을 펴고 있던 남유다를 향해 바벨론은 칼을 겨누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에게 바벨론의 침략을 예언한 적이 있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왕하 20:17-18). 그후 백여년이 지나 이사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현실 역사의 한페이지로 빠르게 쓰여져 내려가고 있었다. 바벨론의 침략은 그 멍에를 거부한 남 유다를 향한 이방 나라의 정치 군사적 보복이나 경제적 수탈 이상의 의미가 있다. 바벨론의 침략은 남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예레미야는 선지서1-25장에서 자세히 나열한다. 제사장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였다 (2:8). 남유다의 백성들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렸다 (2:13). 예루살렘은 패역과 배교의 현장이 되어 버렸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나무를 베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목채를 만들라 이는 벌 받을 성이라 그 중에는 오직 포학한 것뿐이니라” (6:6).
사진: 헤브론 막벨라 굴
예루살렘은 영원하리라! 라는 거짓된 믿음에 사로집힌 왕들과 백성들은 죄악의 소굴에서 하나님과 바알의 이름을 함께 불렀다. 바벨론 군사들의 발자국 소리가 예루살렘 성밖에 들려오는 그 순간 조차도 왕들과 백성들은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메세지를 거부하였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유다의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말하여 이르되…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끊임없이 보내셨으나…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다…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땅으로 영원한 패허가 되게 하리라…(25:2-9).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항복하는 길만이 살길임을 외쳤다 (38:18-20). 남 유다의 백성들은 겸손히 하나님이 준비하신 회초리인 바벨론에게 종아리를 걷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매를 피할 길만을 찾기에 급급하었다. 결국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수많은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예루살렘을 우상처럼 섬기던 완고한 배교와 패역한 백성들 앞에 섰던 선지자.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주장하여 역사와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찍힌 선지자 예레미야. 왕들과 백성들의 온갖 협박과 조롱속에서도 그가 심판의 메세지를 전할 수 있었던 힘과 용기는 남 유다의 임박한 멸망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미래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바벨론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을 때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라고 명한다 (32:6-14). 줄곧 남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던 선지자에게 밭을 사라니! 그러나 그 밭은 장래 유다의 회복을 담은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32:15).
유대 전승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성전 파괴일 (티샤 베아브)에 출생하였다고 한다. 예레미야의 출생일에 대해 유대 전승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어쩌면 유대 전승은 예레미야의 선지 사역의 중심이 되었던 예루살렘의 멸망을 투영하여 그의 출생일을 티샤 베아브로 정한듯 하다. 한편 이스라엘 전통 절기인 로쉬 하샤나 (새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다의 회복을 알리는 렘 31:15-17을 읽는다. 소망이 있는 멸망을 전하였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그 눈물은 멸망을 바라봐야 했던 선지자의 심장을 찌르는듯한 아픔과 다시 회복될 하나님의 백성을 바라보았던 희열의 눈물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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