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나의 종, 나의 사자-messenger)는 자신에 대한 소개 대신에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1:1) 라는 말로 자신이 전하는 메세지가 누구(하나님)의 것이며, 그 메세지를 수신하는 이들이 누구(이스라엘)인지만을 밝힌다. 말라기가 사역하던 시대 상황은 참으로 암울하였다. 성전 재건 공사를 마치고 나서 약 60-100년 정도가 지났고 성전 재건에 직접적으로 나섰던 이들이 여전히 생존하였다. 그들은 선지자 학개가 전한 하나님의 약속,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 2:19),” 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활 현장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하였다. 심지어 가난한 이들은 양식을 얻기 위해 자녀들을 종으로 팔아야 했고, 경제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느 5:5).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말 1:2)라는 백성들의 질문은 말이 아닌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실망을 보여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하나님은 답한다. “아하브티 에트켐”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다!, 1:2). 문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백성들에게 있었다. 말라기는 그의 이름의 뜻답게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1:8),”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1:14),” 또는 “여호와가 이르노라” (3:13) 라는 말을 열 아홉번이나 반복하여 언급한다. 이 열 아홉번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말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준비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유들을 하나 하나 나열한다.
사진: 눈 내린 예루살렘 (프랜치 힐) 사진 제공: 유택수 목사
이들은 더러운 떡과 눈멀고 병든것, 심지어 훔친 것들을 여호와의 제단에 바쳤다. 과거 솔로몬 성전이 건재할때는 우상을 성전 안으로 끌여들여 우상 숭배를 하였다. 이제는 성전에서 더 이상 우상을 섬기지 않았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고 희생 제물을 바쳤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예배와 희생 의식이 행해지는듯 싶었으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1:10). 당시 제사장들, 오늘날로 말하면 목회자들은 더 심각한 영적 질병에 걸려 있었다. 제사장(목회자)은 진리. 의. 화평. 정직, 그리고 많은 사람을 죄악에서 떠나게 하고, 지식을 지키고 사람들이 그 제사장에게 율법을 구하는 여호와의 사자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제사장(목회자)이 하는 일은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 타락의 선봉 역활을 하고 있었다. 제사장(목회자)의 타락은 곧 백성(교인)의 타락으로 이어졌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이들의 종교 생활은 건강해 보였다. 정기 예배 모임에 빠지지 않았고, 눈물과 울음과 탄식의 예배과 헌금도 드렸다 (2:12-13). 그러나, 성전(교회) 밖에서의 삶은 가증함뿐이었다. 이들은 이방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어려서 얻은 아내와 이혼을 하였고 (2:11, 14-16),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고 학대하였다. 그러면서도 입술로는 소리 높여 헛된 정의를 외쳤다 (2:17).
“우리가 언제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까?” (1:6) “왜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2:14). “우리가 언제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습니까?” (2:17)의 질문으로 하나님께 반문하는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오히려 소망이 있어 보인다. 적어도 그들은 여호와께서 예배를 받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우리 시대의 교회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영적 감각이라도 있는지 조차 의문이 드는 슬픈 현실을 숨길수 없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것, 즉 십일조와 봉헌물을 도둑질한다고 지적한다. 흔히 십일조라면 수입의 10/1을 드리는 것을 떠올리겠지만, 말라기서에서 말하는 십일조는 이와 성격이 다른 레위인. 과부. 고아. 나그네를 돌보는 3년마다 드리는 십일조이다 (참조. 신 114:28-29; 26:12-13; 느 13:10-13). 성서는 이 십일조를 통해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교회가 선택적으로 해도,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이고 교회가 당연히 해야 할 것임을 말한다. 말라기의 하나님은 백성들이 그 타락의 길을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아올것을 촉구하면서( 3:7) 3년에 한번 드리는 십일조의 회복을 말씀하신다. 진정한 영적 회복은 기도와 예배. 규칙적인 QT 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방법은 가난한 자, 과부, 고아, 나그네, 그리고 품꾼을 돌아보는 삶의 현장에서 실제적으로 행하는 일들을 통해, 더 나아가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한다. 즉 삶이 변하지 않으면 그 어떤 예배, 기도, 찬양, 그리고 봉헌도 무 가치하고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진: 눈 내린 예루살렘 구도시. 사진 제공: 유택수 목사
가식과 외식에 눈이 가리워진 백성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것이 무가치한 일이며,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한다 (3:14).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지만, 그 분은 언제나 보시며,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그 분은 언제나 가까이 계신 분이시다. 그 분은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지지 않는 자를 분별하시는 분이시다 (3:18). 그리고 그 날,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다가오고 있다 (4:5-6).
“세상은 요지경” 이라는 한때 유행하던 노래가 있었다. 슬프고 안타깝게도 요즈음엔 “교회는 요지경” 이라는 부르고 싶지 않은 노래가 유행하지 않을까 싶다. 뉴스를 통해 터지는 사건들을 보며, 가슴이 뜨끔뜨끔하다. 혹시 저 일을 저지른 사람에게 십자가 장식이…, 혹은 교회 교인이 아닐까? 아니 교회 목사가… 말라기 시대의 영적 무감각증. 삶과 예배의 괴리라는 질병. 생활속에 드러나야 할 하나님이 가리워지고 하나님이 욕을 먹는 야누스적인 영적 가면을 쓰고 사는 고질적인 질병에 빠진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만 쏙쓰리게 할 뿐이다.
12월이다. 지나온 334일을 정리할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삶을 회계할 때가 되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동안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전하는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다. 삶이 없는 예배는 이미 생명없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예배일 뿐이다. 교회의 타락은 치유할 수 없는 암덩어리를 양산하였다. 다른 선지자의 외침을 듣기 위해 400년을 기다리며 죄악의 옷을 입고 지날 필요는 없다. 새해가 오기전, 말라기 선지자가 전하는 열 아홉번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에 우리 자신을 세우자. 그리고 우리 삶의 현장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라는 발자국이 남아 있는지를 돌아보고, 새해에는 예수의 흔적을 예배와 삶속에 남기는 예수의 사람으로 살아가자.
* 위 글은 새가정 2014년 12월에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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