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또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의 앞에서 읽으매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 (왕하 22: 8, 10-13).
오늘날은 인터넷과 방송의 발전으로 인해 전 세계의 소식들을 실시간으로 전해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루고 있는 성서의 시대 - 지금부터 거의 3천년전-에는 전혀 통신 장비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이 북쪽 단에까지 전달되기까지는 적어도 몇일이 걸립니다. "아버지 돌 굴러가요" 했더니 벌써 아버지는 돌에 맞아서..네 이눔아! 할 정도로 정보 전달 및 공유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발명 이후 일반인들도 성서를 쉽게 접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발에 채이는 것이 성서라고 할 정도이죠. 하지만, 인쇄기 발명 이전에는 모든 성서를 손으로 필사하였고, 종이 발명 이전에는 가죽이나 파프루스에 성서 사본들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얼마나 희귀했을지는 가히 상상이 됩니다. 어쩌면 평생 성서 한번 보지 못하고 죽은 이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요시아 왕 시대에 발견한 성서 이야기를 주의해서 보십시오. 요시야 왕이 무엇때문에 놀랍니까? 바로 발견된 성서때문에, 그리고 그 안에 기록된 율법의 내용때문에 놀랍니다. 그렇다면, 왕 조차도 성서를 접하기기 매우 어려웠다는 것을 추정해 볼수 있고 왕 조차도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현대 문명의 안경으로 성서를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성서 시대의 사건을 생생하게 살아나도록 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할 가능성을 늘 지니고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 이후에도 가나안 백성들과의 문화, 종교, 정치, 사회적 교류를 지속적으로 해오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서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했다면, 혹은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면 그들은 아마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 의식에 동화되거나 그들 나름대로 새로운 종교적 의식 (성서의 뜻에 위배되는)을 창조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 예가 바로 아라드에서 발견된 성전입니다. 텔 아라드에서 발견된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을 작게 축소 시켜 놓은 것처럼 보이는데 지성소를 보면 큰 돌기둥이 있습니다. 추정하건데 이 돌기둥은 여호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라드의 성전은 성서적 입장에서 볼때 문제가 있는 것이죠.
시내 반도에서 발견된 또 다른 성전에서는 여호와의 그의 첩 아세라 라고 적힌 토기 조각도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분히 성서를 접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 민족의 종교에 일정 부분 동화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 시대로의 타임머신 여행이 필요합니다. 그 때로 돌아가서 당 시대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오늘은 계속해서 히브리 성서 사본들중에서 맛소라 택스트, 사마리아 오경, 유대광야에서 발견된 택스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맛소라 택스트: 때로 맛소라 택스트는 "받아들여진 택스트"로 불리기도 합니다. 맛소라 택스트는 중세기 당시 유대교의 중심 세력으로부터 막소라 택스트가 유일한 택스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결과 서로 약간의 차이점을 갖고 있는 맛소라 택스트는 다른 택스트들보돠 널리 공유되었습니다. 이 택스트는 중세기때 최종본이 나오게 되었고 흔히 맛소라 택스트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유대 광야에서 발견된 초기 택스트들은 발음과 강세가 없는데 이를 선-맛소라 택스트라고 합니다. 1세기경 선 맛소라 택스트는 유대교내의 다른 택스트들 사용이 약해지거나 중지된 것에 반해 지속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유대교뿐 아니라 기독교와 성서 학자들에게는 결정적인 택스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맛소라 택스트는 제 1차, 2차 성전 시대에 존채하던 많은 택스트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입니다.
2. 사마리아 오경: 사마리아 오경은 초기 히브리어의 특별한 형태로 씌여진 토라의 고대 택스트입니다. 이 오경은 사마리아 공동체에 의해 보존되었습니다. 이 택스트는 유대인의 택스트에 근거를 두고 있느며 사마리아 오경의 초기 버전은 쿰란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초기 버전에 사마리아인들이 음성학적 변화와 이데올로기적 변화를 주었습니다.
3. 유대 광야에서 발견된 택스트: 기원전 3세기 중반에서 기원후 135년 사이에 유대 광야 특별히 쿰란에서 발견된 택스트로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고 헬라어 (성서와 비성서 택스트 포함) 택스트들이 있습니다.
서론이 길다보니 본론이 짧아졌습니다. 쩝...
내일이 추석이네요. 맛있는 송편 많이 드시고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여기 이스라엘도 장막절을 맞이해서 몇일동안 달콤한 휴일을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인터넷과 방송의 발전으로 인해 전 세계의 소식들을 실시간으로 전해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루고 있는 성서의 시대 - 지금부터 거의 3천년전-에는 전혀 통신 장비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이 북쪽 단에까지 전달되기까지는 적어도 몇일이 걸립니다. "아버지 돌 굴러가요" 했더니 벌써 아버지는 돌에 맞아서..네 이눔아! 할 정도로 정보 전달 및 공유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발명 이후 일반인들도 성서를 쉽게 접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발에 채이는 것이 성서라고 할 정도이죠. 하지만, 인쇄기 발명 이전에는 모든 성서를 손으로 필사하였고, 종이 발명 이전에는 가죽이나 파프루스에 성서 사본들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얼마나 희귀했을지는 가히 상상이 됩니다. 어쩌면 평생 성서 한번 보지 못하고 죽은 이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요시아 왕 시대에 발견한 성서 이야기를 주의해서 보십시오. 요시야 왕이 무엇때문에 놀랍니까? 바로 발견된 성서때문에, 그리고 그 안에 기록된 율법의 내용때문에 놀랍니다. 그렇다면, 왕 조차도 성서를 접하기기 매우 어려웠다는 것을 추정해 볼수 있고 왕 조차도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현대 문명의 안경으로 성서를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성서 시대의 사건을 생생하게 살아나도록 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할 가능성을 늘 지니고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 이후에도 가나안 백성들과의 문화, 종교, 정치, 사회적 교류를 지속적으로 해오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서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했다면, 혹은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면 그들은 아마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 의식에 동화되거나 그들 나름대로 새로운 종교적 의식 (성서의 뜻에 위배되는)을 창조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 예가 바로 아라드에서 발견된 성전입니다. 텔 아라드에서 발견된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을 작게 축소 시켜 놓은 것처럼 보이는데 지성소를 보면 큰 돌기둥이 있습니다. 추정하건데 이 돌기둥은 여호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라드의 성전은 성서적 입장에서 볼때 문제가 있는 것이죠.
시내 반도에서 발견된 또 다른 성전에서는 여호와의 그의 첩 아세라 라고 적힌 토기 조각도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분히 성서를 접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 민족의 종교에 일정 부분 동화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 시대로의 타임머신 여행이 필요합니다. 그 때로 돌아가서 당 시대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오늘은 계속해서 히브리 성서 사본들중에서 맛소라 택스트, 사마리아 오경, 유대광야에서 발견된 택스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맛소라 택스트: 때로 맛소라 택스트는 "받아들여진 택스트"로 불리기도 합니다. 맛소라 택스트는 중세기 당시 유대교의 중심 세력으로부터 막소라 택스트가 유일한 택스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결과 서로 약간의 차이점을 갖고 있는 맛소라 택스트는 다른 택스트들보돠 널리 공유되었습니다. 이 택스트는 중세기때 최종본이 나오게 되었고 흔히 맛소라 택스트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유대 광야에서 발견된 초기 택스트들은 발음과 강세가 없는데 이를 선-맛소라 택스트라고 합니다. 1세기경 선 맛소라 택스트는 유대교내의 다른 택스트들 사용이 약해지거나 중지된 것에 반해 지속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유대교뿐 아니라 기독교와 성서 학자들에게는 결정적인 택스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맛소라 택스트는 제 1차, 2차 성전 시대에 존채하던 많은 택스트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입니다.
2. 사마리아 오경: 사마리아 오경은 초기 히브리어의 특별한 형태로 씌여진 토라의 고대 택스트입니다. 이 오경은 사마리아 공동체에 의해 보존되었습니다. 이 택스트는 유대인의 택스트에 근거를 두고 있느며 사마리아 오경의 초기 버전은 쿰란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초기 버전에 사마리아인들이 음성학적 변화와 이데올로기적 변화를 주었습니다.
3. 유대 광야에서 발견된 택스트: 기원전 3세기 중반에서 기원후 135년 사이에 유대 광야 특별히 쿰란에서 발견된 택스트로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고 헬라어 (성서와 비성서 택스트 포함) 택스트들이 있습니다.
서론이 길다보니 본론이 짧아졌습니다. 쩝...
내일이 추석이네요. 맛있는 송편 많이 드시고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여기 이스라엘도 장막절을 맞이해서 몇일동안 달콤한 휴일을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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