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히브리대 교정에서 찍은 것입니다. 요 몇일사이 기온이 올라가더니 꽃들이 만발하더군요. 드디어 겨울이 가고 여름이 오려나 봅니다.
"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이 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7:27-28).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때 사용하셨던 잔 - 1897년 프랑스 화가 가스톤 데라토취의 그림에 묘사된 것-은 중세 시대때부터 "성배"로 알려져왔다. 순례자들과 기사들 그리고 고고학자들은 이 역사적인 유물을 찾기 위해 곳곳을 뒤졌다. 하지만 벤 베테른톤 3세가 주장하는 것처럼 성배는 엉뚱하게 알려져왔다. 성배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 상징적인 의미로서 중요한 것이지, 흔히 말하는 기적이나 마술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림: 프랑스 화가 가스톤 데라토취의 최후의 만찬과 성배 (1897)
구약성서에 나오는 "잔"은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한다. 이사야 51:17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 비웠도다"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잔 역시 죽음과 세상에서의 고난을 상징하지만, 예수의 손에 들린 그 잔은 새로운 상징 즉 구속을 뜻한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존스 박사는 성배를 손에 얻으려 하는 악당과 함께 잔들이 가득한 방에 도착을 한다. 성배 지킴이 기사 템플러 주위에는 금은 보석으로 장식된 잔들과 평범한 나무로 만들어진 잔이 놓여져 있다. 이 중 어느 것이 과연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한 잔인가? 전통에 따르면 (또한 템플러의 말에 의하면) 그 성배를 얻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는 그 잔은 과연 어느 것인가? 악당은 금으로 만들어진 잔을 손에 들고 그 안에 담긴것을 마신다. 곧 그는 먼지처럼 사라져버리고 만다. 템플러는 "불쌍한 사람같으니 어리석은 선택이었어..."라는 말을 남긴다.
그렇다면 그 악당의 선택만이 어리석은 선택인가? 혹은 성배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선택은 아닌가?
성배를 찾기 위한 역사적인 노력은 중세 시대때부터 계속되어왔다. 하지만 성배의 탐구자들은 신약성서 시대에 사용되었던 잔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그런 성배가 있든지 없든지, 우리가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바울서신과 복음서에 나오는 잔에 관한 기사이다.
신약성서 택스트를 통해 살펴볼 첫번째 문제는 최후의 만찬에 사용된 잔의 재질이다.
아마 금속재질로 만들어진 잔은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마태, 마가 그리고 누가복음서에 의하면 이 최후의 만찬은 유대의 유월절 절기때 있었으며 이 때 사용된 잔은 왕의 만찬에 사용될법한 그런 잔이 아닌 매우 지극히 평범한 잔이었을 것이다. 복음서는 이 만찬의 주인이 부유한 사람으로 매우 값비싼 잔이나 그릇을 사용했다는 언급을 전혀 하지 않는다. 목수 예수와 어부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에 사용되었을법한 잔은, 1세기경 로마 제국내에서는 유리 잔이 매우 흔히 상용되었지만,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나무로 된 잔이나 석회암 재질의 지극히 평범한 잔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최후의 만찬때 사용된 잔이 몇 세기동안 보존되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매우 힘들다. 더나아가, 그 잔에 특별한 기호가 새겨져 있거나 모양이 특이하여서 다른 잔들과 구분이 되었을리도 만무하다.
사진: 석회암 재질의 머그 잔 - Israel Museum, Jerusalem
틀림없이 "진품 성배"는 중세 기사들의 전설처럼 보석으로 장식이 되거나 금박을 입힌 잔은 아니었다. 아마 성배는 유리나 나무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2천년동안 보존되었을 가능성이 전무하다. 1세기 중엽에서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될때까지 이스라엘에서는 부드러운 석회암 재질의 머그 잔 (손잡이가 달린 잔)을 주로 사용하였다. 유대 율법에 의하면 제의적 정결의식이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유리나 세라믹 재질은 부정해질 수 있는 반면 돌로 만들어진 재품들은 부정함이 침입하지 못하기 때문에 (참조: 레위기 법에 나오는 부정한 짐승이나 곤총들이 유리나 세라믹 잔에 닿게 되면 잔을 파기 처분해야 함)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그릇이나 잔을 주로 사용하였다.
두번째 질문은 최후의 만찬때 몇개의 성배가 있었는가? 이다.
최후의 만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바울이 기록한 고린도전서 (주후 50년대 초반)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this cup)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this cup)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 11:25-26). 본문에서는 이 잔 (this cup)이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마가복음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또 잔을 (the cup)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막 14:23). 마태복음 26:27과 누가복음 22;17에서도 동일하게 하나의 잔만이 언급된다.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잔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바울서신과 복음서의 증거로 볼때 최후의 만찬에서는 단 하나의 잔만이 사용되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최후의 만찬이 나오는 본문에서 예수 자신은 잔을 마셨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펴본바에 의하면, 성배는 단 하나였으며 1세기경 예루살렘에서 사용되던 다른 잔과 다른 특이한 점이 없는 매우 평범한 잔이었다는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신약성서의 내용을 중심으로 잔에 대해 살펴보았다. 한편, 복음서에서 "잔"은 문자적으로, 그리고 은유적으로 사용이 되었다. 잔에 대한 은유적 표현 역시 성배에 대한 질문에 중요한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것이다.
겟세마네에서 최후의 기도를 드리는 예수의 모습을 상상하여 보자. 깊은 슬픔가운데, 예수는 땅에 엎드려져 하나님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부터 구해줄 것을 간구한다. 막 14:36에서 예수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라고 간구한다. 여기서 "잔"은 예수 자신의 죽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본문을 막 10:38에 나오는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간구한 것 "주의 영광주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안게 하여 주옵소서"와 비교해 보자. 예수는 다음과 같이 응대한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막 10:38). 이 구절에서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간접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제자들은 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할 수 있나이다 (막 10:39)"라고 답한다.
왜 예수는 "잔"과 죽음을 연결시키는가? 그 답은 구약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잔"은 악한 자 (때로는 이스라엘, 때로는 이스라엘의 적)가 마시게 될 하나님의 진노를 뜻한다. 예를 들어 시 75:8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꺼기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혹은 사 51:17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갤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 비웠도다". 예레미야 애가 4:21-22, "우스 땅에 사는 딸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라 "잔"이 네게도 이를지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 딸 시온아 네 죄악의 혈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아니하게 하시리로다 딸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
위에 언급된 본문들가운데 나오는 "잔"은 하나님의 진노 혹은 심판이 죄인에게 임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주목할 것은 그 진노의 잔을 하나님께서 직접 붓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나님께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라고 간구한 것은 단순히 죽음의 공포로인해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반드시 임하는 하나님의 죽음의 심판으로 인해 고뇌에 찬 두려움을 표현한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이 잔"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즉 "잔'은 죽음과 더불어 구속을 상징한다. 바울에 의하면,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고전 11:23-25). 이와 비슷하게 막 14:12-26에서도 예수께서 떡을 가지고 "이것은 내 몸이니라", 그리고 잔을 가지고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림: 최후의 만찬 - by the Flemish artist Juste de Grand.
학자들은 최후의 만찬이 유월절 만찬이었는가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끊임없이 논쟁을 벌인다. 아마 최후의 만찬은 기존의 전통적인 유월절에 예수께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재해석을 한 것이리라. 유대 전통에 의하면, 출애굽을 상기시키기 위한 여려 가지 요소들이 유월절에 있었다. 예를 들면, 마짜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던 날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을 먹었던 것을 기념하여 먹는것이다. 유월절 양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죽음의 사지가 문설주에 발린 피를 보고 넘어감으로서 대속적인 희생을 상징한다.
예수께서는 이 유월절은 그 자신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통한 구원의 길을 여는 것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내 몸이라...이 것은 내 피라..."라는 말을 유월절 식사때 하므로써, 새 언약을 재정하셨다. 요한복음은 예수를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한다. (요 1:29).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잔"은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가 담긴 잔 - 즉, 죽음의 상징으로 죄에 대한 신적 심판- 이면서 동시에 구속의 잔이다. 이 잔을 제자들에게 나눠줌으로써, 아직 십자가에서 죽지는 않으셨지만 에수께서는 제자들의 구속을 상징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최후의 식사를 단순한 유월절 식사가 아닌 죄의 노예로 구속되어 있던 제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새로운 출애굽이며 새로운 유월절을 기념하는 식사로 재정하셨다. 그리고 이 기념의 식사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는 것과도 연결된다.
이제 다시 성배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잔은 지극히 상징적인 것이다. 이 잔은 영원한 생명을 생생하게 상기시키는 도구이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잔 자체가 그 어떤 생명을 줄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생명은 오직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 문학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잔에 상징적 의미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전혀 없다. 게다가, 그 잔을 보존해야 할 이유 역시 분명히 없다. 만약 성배를 여전히 찾고 있다면 템플러 기사가 말한 것처럼 매우 불쌍한 수고이자 헛되고 헛된 무익한 일에 불과하다.
Reference: Let this cup pass!: The Futile Quest for the Holy Grail by Ben Witherington III (BR 20:04, Aug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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