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에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렘 4:19)
예레미야서 (꼭 예레미야서라고 불러야 하는가?)는 성서의 책들이 기나긴 시간 동안 발전해 왔는가? 에 대한 탐구를 하는데 독특한 기회를 제공한다.
학적 용어로는 증인 (witnesses)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두개의 버전이 있다. 첫번째는 맛소라 택스트로 알려진 히브리어 버전이 있으며, 두번째는 칠십인역으로 알려진 헬라어 버전이 있다. 맛소라 택스트는 칠십인역보다 20%가 더 길고 택스트의 배열 역시 서로 차이가 있다. 이는 다른 율법서나 예언서 택스트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두개의 택스트를 비교해 보는 것이 요구된다. 히브리어 맛소라 택스트는 헬라어의 옷을 입고 있는 칠십인역과 비교가 아닌 헬라어 버전을 번역할때 이용된 히브리어 택스트와 비교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칠십인역의 원본이 되는 히브리어 택스트는 학자들에게 매우 흥미로운 것이지만 헬라어 번역자들은 이 택스트에 대한 어떤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학자들이 말하는 "볼라게" (기초 택스트)를 헬라어 번역 작업을 한때는 주전 2세기경 알렉산더에서 이뤄졌다.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헬라어 칠십인역에서 히브리어로의 역번역이 가능한가? 실재 역번역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며 거대한 경험과 감각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레미야서의 경우, 일종의 성공 가능성을 말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두개의 버전이 겹치는 부분이 있을뿐 아니라 헬라어 번역이 비교적 엄격하게 번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참조: 히브리어 버전과 헬라어 버전의 겹치는 부분을 비교 조사했을 경우 헬라어 버전이 엄격하게 번역이 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사실 헬라어 택스트는 히브리어 택스트를 거의 문자적으로 번역을 하였다. 이러한 겹치는 경우들을 통해 우리는 칠십인역의 히브리어 택스트를 재창조하는데 크나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두 히브리어 택스트 사이의 배열이나 길이의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헬라어 번역이 이뤄졌던 당시 하나 이상의 예레미야서 히브리어 버전이 통용되었다는 것이다.
두개의 히브리어로된 예레미야서가 있다는 것은 어느 것이 더 원본에 가까운 초기 문서인지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면 짧은 히브리어 버전이 헬라어로 번역되었거나, 긴 히브리어 버전이 헬라어로 번역이 되었을텐데 과연 어느 것인가?
헬라어 번역의 전박적인 엄격한 번역이 있었기 때문에 번역자가 히브리어 택스트를 축약하거나 내용을 재배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번역자는 틀림없이 짧은 히브리어 택스트를 기초로 번역을 하였음이 틀림없다. 이 흥미로운 결론을 뒷받침하는 것은 사해 사본 히브리어 두루마리중 예레미야서의 조각이다.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5개의 예레미야서는 모두 조각들이다. 이 사본들중 3개 (2QJer, 4QJera 그리고 4QJerc) 모 맛소라 택스트의 긴 버전을 따른 것이다. 하지만 다른 두개의 예레미야 사본들은 ( 4QJerb 와 4QJerd - 주전 175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 칠십인역을 히브리어로 역번역했을때의 히브리어 택스트와 비슷하다. 비록 이 두개의 예레미야 사본은 작은 조각들만이 남아 있지만, 이 조각들은 매우 중요한데, 이유는 이 조각들이 칠십인역과 세부적인 내용이 일치할분 아니라 칠십인역의 주요한 두가지 특징들인, 짧은 택스트와 몇몇 장들의 다른 배열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 두개의 사해 사본 택스트는 논의의 여지가 없이 칠십인역의 번역자가 칠십인역을 번역하기 위해 짧은 히브리어 택스트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히브리어 택스트는 맛소라 히브리어 택스트와는 매우 다른 것이었음을 증명한다.
일반적으로 두개의 초기 버전이 있을 경우 본문 비평에서는 짧은 택스트를 오래된 것으로 본다. 이론적으로 짧은 택스트는 그보다 이전의 긴 택스트를 축약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훗날의 편집자들은 택스트를 축약하기 보다는 확장을 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라틴 잠언 택스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Lectio brevior preferenda est - 짧은 택스트가 더 좋은 것이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예레미야의 택스트에도 이는 적용이 된다. 여기에는 몇가지 속사정이 있다. 긴 택스트에 추가가 되는 경우는 종종 짧은 편집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에 대한 짧은 설명이 삽입되기 때문이다. 때때로 긴 택스트에 자세한 내용이 있는 경우는 훗날의 편집자에 의해 삭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문서 양식들은 긴 텍스트에 확장이 된 경우이다. 이러한 예들은 짧은 택스트가 오래된 것임을 가리키는 것이고 좀더 원본에 가깝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제 예레미야의 두 버전에서 몇가지 예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예레미야 27장에서 선지자는 유대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597-586)에게 떠오르는 바벨론 제국과 느부갓네살에게 항복하라고 조언을 한다. 예레미야는 다른 조언자들의 말을 무시하라고 왕에게 말한다.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그들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그들의 말을 듣게 되면 당신은 이 땅에서 쫒겨나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는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도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하지만, 27장 마지막에 가면 다른 주제를 언급한다. 성전의 기구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라고 전한다. "그것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내가 이것을 돌보는 날까지 거기에 있을 것이니라 그 후에 내가 그것을 올려 와 이 곳에 그것들을 되돌려 두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27:22). 이 예언에 의하면 성전 기구들이 다시 원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사실, 성전 기구들의 돌아옴은 27장의 전체 내용에서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과 성전 기구들의 운명과는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더 나아가, 성전 기구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는 예언은 선지자가 한 에언에 손상을 입히는 것이다. 아마, 별로 놀랄일은 아니지만, 27장의 마지막 3구절 (20-22)은 짧은 헬라어 택스트에서는 빠져 있는데 이 택스트가 긴 맛소라 택스트보다 내용상 좀더 논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맛소라 택스트의 27장에 추가된 부분은 훗날 바벨론 제국이 망한뒤 일어난 페르시야의 고레스 당시 성전 기구들이 돌아온 후에 첨가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이처럼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뒤에 첨가되는 예언을 "바티신움 엑스 에벤투"라고 한다. 위에서 제시한 예는 바벨론 유수후 즉 6세기 말경에 고레스가 유대인들의 귀한 명령후에 택스트 (20-22절)가 추가되었다는 분명한 예가 된다. 하지만 본문상에서는 예레미야가 6세기초 유대왕국이 멸망하기 직전에 이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맛소라 택스트에 추가된 다른 본문은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한 것이다. 이 역시 사건이 일어난 후에 본문에 첨가된 것이다. 렘 27:7에서 선지자는 "모든 나라가 그와 그의 아들과 손자를 그 땅의 기한이 이르기까지 섬기리라 또한 많은 나라들과 큰 왕들이 그 자신을 섬기리라"라고 말한다. 이중 이텔릭체로 된 부분은 맛소라 택스트에는 있지만 칠십인역에는 없다. 이 두개의 버전에서 칼, 기근 그리고 역병이 느부갓네살왕에게 복종하지 않는 이들에게 임할 것이라고 에언한다. 그렇다면 이런 예언에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이 구절 역시 사건이 일어난 후에 추가된 것이다.
적어도 두개의 다른 히브리어 버전이 존재했다면, 이 두개의 버전이 어떻게 발전했는가에 질문을 할수 있다. 하나의 버전이 수세기를 거쳐가면서 서기관들에 의해 또 다른 버전이 만들어졌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두 버전의 택스트 내용과 구조의 차이점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비록 선지자의 메시지 중심 내용에 있어서는 큰 차이점이 없지만, 두개의 버전은 몇몇 부분이 완전히 다른 상이점들을 보여주고 있으며 한 버전에 추가된 것이 다른 버전에는 빠져있기도 하다. 이러한 경우들을 서기관의 실수 혹은 수정라고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두개의 버전은 초기 단계로부터 서로 다른 저자들 혹은 편집자들에 의해 탄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서기관들은 이런 큰 변화를 주는 내용상의 추가를 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이점은 반드시 예레미야서가 구성되거나 편집되는 과정중에 일어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레미야의 짧은 버전, 예레미의 초기 버전 (헬라어 버전과 쿰란에서 발견된 두개의 히브리 택스트)을 편집 1 이라고 부르고 긴 버전 (맛소라 택스트)을 편집 2 라고 칭한다. 이 두 버전은 원래 히브리어로 기록이 되었으나 오늘날에는 헬라어로 번역된 버전 (칠십인역)인 편집 1만이 온전하게 존재할 뿐이다. 편집 2에 추가된 내용은 편집자가 편집 1에 포함되지 않은 신뢰할만한 예레미야의 자료에 접근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편집 2는 "에베드=멜레크, (왕의 종) 이디오피아인 (구스)이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구했다고 말한다 (렘 38:7). 이 사건은 편집 1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편집 2에 추가된 부분들중에는 선지자 자신의 고백이 들어 있다. 특히 렘 33:14-26의 예언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이 부분을 종종 예언의 "진짜 가지"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예언의 내용은 다윗왕의 후손이 이스라엘에서 영원한 왕좌에 앉게 될 것이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언약 역시 영원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비록 학자들은 이 예언이 훗날에 첨가된 것이라고 주장을 하지만 이런 회의적인 입장을 지원할만한 논리적인 이유는 없다.
때때로 편집 2의 편집자는 편집 1의 내용을 분명히 해주기도 한다. 편집자는 해석자의 입장에서 택스트의 내용을 바꾸기도 한다. 이러한 내용 바꾸기는 고대 사회에 매우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편집 2가 실제로 많은 바꾸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바꾸기가 선지자의 메시지를 왜곡하지는 않았다. 편집 2의 편집자는 단순히 택스를 바꾸고 좀더 자세한 추가 설명을 통해 내용을 분명히 해주고 편집 1의 함축적인 내용을 명쾌하게 해주기도 하였다.
내용을 분명히 해주기 위한 추가를 하였을때, 이 추가된 내용이 분명하게 보여지기도 하는데, 이는 내용을 추가하는 과정에서 히브리어의 자연스런 언어 구조를 부자연스럽게 해야하는 경우나 구문론적 어려움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가 몸을 피해야 했을때 그는 자신의 서기관이었던 바룩에서 주께서 선지자가에 말씀하신 모든 내용을 담은 두루마리를 공공장소에서 읽으라고 지시를 한다. 편집1에서는 이 선지자의 지시가 단순히 "선지자 앞에서 그 두루마리를 읽다"라고 나온다. 편집 2에서는 히브리어의 자연스런 구조를 깨뜨리면서 내용을 추가한다. "너는 들어가서 내가 말한 대로 두루마리에 기록한 여호와의 말씀을 금식일에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백성의 귀에 낭독하고 유다 모든 성입에서 온 자들의 귀에도 낭독하라" (렘 36:6). 고대 히브리어 택스트에는 구두점, 쉼표, 복합어를 잇는 줄 (하이픈)을 포함하지 않았다. 따라서 한 구절안에 인용된 부분이 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것이다.
다른 경우에, 편집 2는 단순히 편집 1의 함축된 내용을 분명히 밝히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선지자는 바벨론에게 항복을 하라고 계속해서 조언을 한다. 편집 1에서는 예레미야가 단순히 "바벨론 왕에게 고개를 숙이고 섬기라"고 말할 뿐이다. 편집 2에서, 선지자는 좀더 분명히 말한다. "내가 이 모든 말씀대로 유다의 왕 시드기야에게 전하여 이르되 왕과 백성은 바벨론왕의 멍에를 목에 메고 그와 그의 백성을 섬기소서 그리하면 사시리라" (렘 27:12). 편집 1에서는 적을 단순히 "북방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말하지만 편집 2에서는 그 적이 느부갓네살이라고 말한다 (렘 25:9-12, 39:11).
때때로 편집 2는 예언의 머릿말을 달기도 한다. 예를들어, 맛소라 택스트의 렘 16:1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라는 구절이 나온후에 예언이 계속된다. 하지만 칠십인역에서는 이 머릿말이 빠져있다. 하지만 이 차이점 때문에 두 버전사이의 사상적 차이점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종종 편집 2의 편집자는 이런 머릿말을 잘못 추가하는 실수를 한다. 27장에 편집자는 머릿말을 추가한다. "유다의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609-598년)이 다스리기 시작할 때에 여호와께서 말쓰으로 예레미야에게 임하시니라" 하지만 27장은 시드기야왕의 통치때 (597-586년) 에 관한 것이다. 이 실수는 26장의 시작에서부터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편집 1에서, 다른 성서 본문에서 흔히 볼수 있는 것처럼, 첫번째 어구를 거의 완전히 이해를 한다. 하지만 편집 2에서는 이런 이해가 있든 없든 추가적인 내용을 통해 독자들을 돕고자 한다. 따라서 편집 1에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라는 말이 4번 나오지만 편집 2에서는 27번이 나타난다. 이와 비슷하게 편집 2에서만 예레미야의 서기관, 바룩을 "서기관"이라고 부른다. 또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의 왕"으로 반복해서 나오고 여호와킨은 "유다왕 여호와김의 아들"로 불린다. 4QJerd 와 칠십인역에서는 "느부사라단" (렘 43:6)이라고 하지만 맛소라 택스트에서는 "사령관 느부사르단" 이라고 칭한다. 이러한 다양성은 쿰란 사해사본 조각에서 찾아볼 수 있다. 4QJerd 은 칠십인역처럼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 이지만 맛소라 택스트에서는 "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이다. 이처럼 자세한 인물 소개 역시 편집 1의 특징이다.
하지만, 편집 2의 추가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훗날 두개의 히브리어 버전은 독자들에게 함께 읽혀졌다. 분명히 편집 2는 편집 1을 한물간 작품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한편 이 두개의 버전이 언제부터 독자들에게 회람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길이 없다. 다만 이 두 버전은 제 2차 성전시대가 끝날 무렵 (주후 70년)까지 사용되었음을 쿰란 사해사본의 발견을 통해 알수 있다. 그 당시 우리가 부르는 히브리 성서는 완전히 완성된 것이 아니었으며 정경 역시 정해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다양한 문서들이 통용되었다. 성전에서 성서를 낭독할때 편집 2는 선호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며 편집 1은 이스라엘에서 통용되다가 주전 2세기경 이집트로 옮겨져서 칠십인역의 번역을 위해 사용되었고 훗날 쿰란에서도 편집 1이 사용되었다.
만일 맛소라 택스트만이 살아남았다면 우리는 결코 예레미야서의 발전 과정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감사하게도 칠십인역과 쿰란에서 발견된 두개의 예레미야서 두루마리 조각으로 인해 예레미야서의 발전 과정을 되집어 갈 수 있게 되었다.
Reference from "The Book of Jeremiah: a Work in Progress By Emanuel Tov (BR 16:03, Jun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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