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완성은 책상머리가 아닌 시장 골목이라는 유대인들의 말대로 흰 종이에 검은 잉크의 집합체인 말을 생활 현장에서 실천할 때 성경이 진정한 의미가 있음이 평범한 상식이 되어야 한다.
최근 현직 여 검사가 어느 뉴스 인터뷰에서 폭로한 Me Too 말미에 성추행 당사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남겼다. “회개는 피해자들에게 직접 해야 한다!” 그 말이 여전히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교회 예배당에서의 회개가 검은 지하에서 돈세탁을 하듯 회개자의 마음만 씻어주지 않나 라는 생각이 가슴 한 복판에서 떠나지 않는다.
회개를 뜻하는 성경 언어인 히브리어는 “슈브”로 ‘돌아가다, 돌이키다’ 의 뜻이 있다. 성경 레위기 6장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쳤을 때, 배상을 명한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지울 수도 외면할 수도 없다. 그것은 구약이고, 우리는 신약 시대에 살고 있으니 비껴 갈 수 있다고 에둘러 말해서는 안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는 어설픈 말도 구차한 변명일 뿐이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예수께서 율법사에게 한 말이다. 그 말이 율법사의 귀와 가슴을 움직였다면, 그래서 결단하였다면 그는 두번째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것이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는 그저 앞으로 잘해! 가 아니다. 과거 청산이 있어야 한다. 여전히 율법사로부터 외면 받았던 인생들이 울고 있다. 율법사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귀를 막았던 율법사로 인해 절망한 영혼들이 이웃에 살아 가고 있다. 그 과거의 청산 없이 앞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면 되지! 는 실현해서는 안되는 거짓된 회개이며 결단이다. 예수의 말은 “너의 과거로 돌아가라! 그리고 너로 인해 눈물 흘렸던 이들, 상처 받은 이들에게 용서를 구하라. 그것이 두번째 선한 사마리인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이다.
사진: 성묘 교회 내부
집으로 돌아오는 탕자는 그의 과거로 돌아간 것이다. 잘못 결정하고 선택한 자신의 과거로 돌아갔고 회개하였다. 탕자는 하늘(하나님)에게만 죄를 범하였다고 고백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도 그는 죄인이었고, 그의 죄의 짐을 내려 놓기 위해 아들이 아닌 종이 되기를 구하였다. 이것이 회개이다.
삭게오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아무도 삭게오의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는데 예수는 분명하게 말하였다. 삭게오야 내려와라! 그저 나무에서 내려오라 는 것이 아니다. 탐욕의 과거에서 내려올 것. 상처 주었던 과거에서 내려 올 것. 용서받는 자리로 내려 올 것을 말한 것이다. 삭게오가 내려왔다. 그는 예배당에서 숨 죽이며 경건한 자세로 하나님께 자신의 과거 청산을 하지 않았다. 재산의 절반! 토색한 물건의 네 배를 갚는 회개를 하겠다 하였다. 즉 삭게오가 예수의 사람으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의 과거로 먼저 “슈브” 돌아가야 했다. 이것이 회개이다.
바울이 동역자 빌레몬에게 편지를 썼다. 빌레몬 집에서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가 감옥에서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영접한 뒤였다. 오네시모가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가 되었으나, 아직 해결하지 못한 죄의 문제가 있다. 주인 빌레몬에게 갚을 것이 남은 것이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슈브” 돌려 보낸다. 오네시모는 단지 주인에게만 돌아간 것이 아니다. 그의 과거로 “슈브” 돌아간 것이며, 주인에게 범하였던 죄의 자리로 돌아가서 죄를 청산해야 했다. 그것이 예수의 제자로서 행해야 할 삶의 상식이며 정상적인 회개이다.
사진: 성묘 교회의 기도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회개는 피해자들에게 직접 해야 한다는 여 검사의 말은 매우 상식적이며 성경적이다. 교회 예배당은 회개의 면죄부를 찍어내는 곳이 아니다. 단 몇 초만에 회개하였다 하여 용서를 받는 현장은 더더욱 아니다. 사람에게 죄를 범하였다면 그에 따른 마땅한 책임과 보상이 있어야 한다. 회개는 하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하늘과 땅을 동시에 바라보는 것이다. 회개는 앞으로 변화되면 돼! 가 아니다. 회개는 뒤를 다시 바라보는 것을 통해 변화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죄를 다루는 수준, 회개의 수준을 낮추면 그것은 타락의 절벽에 위태롭게 한쪽 발로 버티고 서 있는 것과 같다. 10억엔을 주고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고 못을 박는 일본 정부의 발언에 분노하는 것은 액수가 적기 때문이 아니다. 진정성 있는 사죄를 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여전히 울고 있기 때문이다.
회개의 자리는 예배당을 넘어서야 한다. 예배당 밖, 여전히 그 상처와 아픔으로 인해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는 그 누군가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것이 회개이다. 이 지극히 평범한 성경의 상식이 특별, 어색, 혹은 외면이 되는 순간 회개는 나를 타락시키는 해독제 없는 바이러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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